남편이랑 딸이랑 셋이 사는데, 장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있어요. 분명히 냉장고가 꽉 찼는데 왜 저녁 메뉴는 항상 고민일까. 며칠 전 아반떼 정비 때문에 지출이 좀 커서, ‘이번 주는 카드 긁지 말고 진짜 남은 재료로만 버텨보자’ 결심했거든요. 식비 아끼는 의미도 있고, 냉장고 순환도 시킬 겸. 그래서 딱 일주일, 냉장고 파먹기(이하 냉파) 해본 후기 남깁니다. 주의: 식단이 고급스럽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워킹맘이라 시간도 없어서 화려한 요리는 없습니다.
시작 전에 조건부터 말씀드릴게요.
- 마트, 배달앱, 쿠팡프레시 등 어떤 구매도 하지 않는다.
- 양념류(간장, 소금, 고추장 등)는 기본적으로 있는 걸로 친다. 이마저도 없으면 굶어야 돼서.
- 아이 학교 급식은 별도 외식비로 처리하고, 어른 식사만 냉파 대상으로 한다.
시작 며칠 전에 냉장고와 냉동실을 전부 까봤어요. 제 기준에서 살릴 만한 재료들을 정리했는데, 생각보다 먹을 게 나오긴 하더라고요. 수첩에 목록을 적어봤습니다.
- 신선칸: 양파 1개, 당근 반 개, 애호박 반 개, 대파 2뿌리, 고추 3개 남은 것, 방울토마토 한 줌, 사과 1개
- 냉장고 문: 계란 7알, 두부 반 모, 체다치즈 2장, 플레인 요구르트 1개
- 냉동실: 냉동 새우 150g쯤? 한 움큼 남은 것, 냉동 블루베리 몇 알, 식빵 4조각, 돼지고기 앞다리살 냉동된 것 300g쯤 한 덩이, 라면 사리용 생면 한 줌
- 그 외: 쌀 적당량, 국수 건면 1봉 남은 것, 미역 약간, 묵은 김치 조금
이 목록 보자마자 든 생각: 채소가 진짜 없구나. 식비 중에 채소·과일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했어요. 그리고 고기가 앞다리살 한 덩이뿐이라 단백질원이 계란 아니면 새우뿐.
일주일 동안 대략 이렇게 먹었습니다. 레시피보다는 그냥 제가 임기응변으로 만든 기록이에요. 요리는 homefoodwiki.com 여기서 남은 재료명으로 검색해보고 참고했어요. ‘애호박 당근’ 넣으니까 전 레시피가 주르륵 나오더라고요. 정확히 일치하는 재료가 아니라도 보면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어요.
월요일 저녁: 양파 1개, 당근 반 개, 돼지고기 앞다리살 300g을 한꺼번에 볶아서 간장 양념 강하게 한 뒤 밥에 얹어 덮밥. 이때 채소는 거의 소진. 화요일 저녁: 남은 두부 반 모 으깨서 냉동 새우 조금, 계란 1알 풀어서 부침. 밀가루 대신 전분 조금 넣어서 겉바속촉. 묵은지랑 같이 먹으니 그럴듯했어요. 수요일 저녁: 대파 2뿌리, 고추 3개를 가늘게 썰어 기름에 살짝 볶다가 계란 2알로 스크램블. 고소한 기름 냄새에 애가 한 입 달라고 와서 결국 딸도 한 젓가락 했어요. 목요일 저녁: 애호박 반 개, 방울토마토 반만 남겨서 올리브유에 살짝 굽고, 건면 삶아서 오일 파스타 비슷하게. 소금 후추로 간하고 체다치즈 한 장 찢어 올리니 아이도 나름 잘 먹더라고요. 남은 방울토마토는 다음날 아침에 그냥 먹었어요. 금요일 저녁: 냉동 새우 진짜 다 털어 넣고, 사리용 생면 한 줌 삶아서 얹고, 고추장·간장·설탕 조금 넣은 양념장에 비빈 국수. 새우가 적어서 볼륨감은 별로였어요. 토요일 점심: 식빵 4조각에 계란물 입혀서 프렌치토스트, 플레인 요구르트와 냉동 블루베리 몇 알 갈아서 소스처럼 뿌려 먹었어요. 토요일 저녁: 밥에 참기름 간장 계란후라이 하나 올리고, 남은 김치. 그야말로 무념무상 식사. 일요일 점심: 미역 남은 것 불려서 간단하게 미역국. 밥 말아서 참기름 한 방울. 저녁은 결국 아이랑 남편은 밖에서 사 먹고 전 미역국에 밥 말아 먹었어요. 단백질 보충이 아쉬워서 계란 1알 풀어 넣음.
숫자로 정리해보면,
- 사용한 계란: 7알 중 6알 (1알은 월요일 아침에 아이 반숙용으로 씀)
- 버린 음식물: 0g. 대파 뿌리랑 계란 껍데기 외엔 음쓰가 안 나왔어요. 이건 진짜 놀라웠어요.
- 지출: 식료품비 0원. 대신 금요일 저녁쯤 되니 과일이나 견과류가 간절하긴 했습니다.
확실히 불편하지만 배우는 게 많더라고요.
- 양념과 계란의 힘: 계란 7알이 없었으면 중반에 무너졌을 거예요. 단백질 보충이 안 되니 허기가 빨리 돌아오고, 결국 요리에 힘을 주는 건 신선식품보다 양념이라는 것도 느꼈고요. 남은 고추장 찍어 먹는 것만으로도 한 끼가 버틸 만해지는 느낌.
- 색깔 먹기: 채소류가 바닥나니 식탁이 갈색과 노란색만 남더라고요. 녹색이 없으니 영양뿐 아니라 기분도 침체돼요. 나중엔 냉동 블루베리 몇 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눈으로 먹는 것도 있다는 걸 실감.
- 냉동실은 구멍덩어리: 냉동실에 대충 넣어둔 것들이 제 기능을 못 해요. 앞다리살 덩어리는 한 번 삶아 수육으로도 가능했을 텐데, 저는 그 생각을 일요일에야 했죠. 결국 월요일에 전부 털어 썼어야 했을 재료를 남겨버린 셈.
단점도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우선 아이한테 제대로 된 식단을 못 준다는 죄책감이 좀 들었어요. 학교 급식 덕분에 점심은 해결되지만, 저녁 메뉴가 너무 빈약하면 엄마 마음이 불편해요. 그리고 예상보다 빨리 채소가 사라져서, 후반부엔 변비 걱정이 들기도 했고요. 실제로 처방전 없이 사둔 유산균 제품이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아이 화장실 가는 게 신경 쓰였을 거예요.
냉파가 무조건 저렴하게 식비를 줄이는 방법이냐?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제 경우는 일주일 지출이 0원이었으니 당장은 절약이었지만, 사실 이건 기존에 사둔 재료를 소비한 것뿐이에요. 다음 주에 평소보다 더 많이 장을 보게 될 수도 있고, 결국 비용은 뒤로 밀려나는 거죠. 다만 냉장고를 비우면서 내가 평소에 뭘 낭비하는지, 어떤 재료를 중복으로 사는지 확실히 알게 되는 효과는 있어요.
이게 '무용지물 살림템' 이야기랑 연결되기도 하더라고요. 예전에 산 냉동실 전용 진공포장기, 결국 비닐값이 아까워서 안 쓰고 구석에 방치 중이었는데, 이번에 그냥 냉동 앞다리살을 바로 꺼내 썼잖아요. 냉동 보관이 너무 오래되면 지방이 산패되기 때문에 빨리 털어내야 하는데, 고급 보관 도구가 있다는 이유로 묵혀두고 있었던 셈이에요. 비싼 보관 용기 채우는 습관이 오히려 냉파의 적이더라고요.
앞으로는 무리한 0원 냉파보다 ‘2주에 한 번은 냉장고 리셋 주간’을 정해두고 그때만큼은 냉동실을 진짜 비우는 방식으로 해볼까 해요. 사실 하루이틀 굶는 건 어른이 참으면 되는데, 어린이 있는 집은 균형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도 지난 일주일은 부엌 일이 많이 단순해져서 피곤하진 않았어요. 메뉴 고민을 안 하니까 오히려 정신 노동이 줄더라고요. 여러분도 혹시 냉파 도전하신다면, 계란 확보와 냉동채소 한 팩 구비는 필수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