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진짜 충격받았던 게 있어요. 4월에 애호박 두 개 6,800원 주고 산 거예요. 쿠팡에서 대충 시켰는데 받고 나서 깜짝 놀랐죠. 그 주 주말에 엄마랑 통화하다가 "요즘 애호박 왜 이렇게 비싸?" 했더니 엄마 왈, "4월에 애호박이 제철이니?" 이 한마디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 저는 그때까지 요리는 계량이고 과학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식재료가 언제 맛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그때부터 엑셀에다가 '제철 달력' 시트를 하나 파고 진지하게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일단 제가 쓰는 제철 달력은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농촌진흥청에서 배포하는 제철 농산물 포스터 pdf 따서 필요한 것만 정리한 거예요. 복잡한 거 필요 없고 그냥 텍스트로 쭉 뽑아요. 예를 들면 5월이면 '미나리, 냉이, 달래, 두릅, 쑥, 멸치, 주꾸미, 키조개' 이렇게 나열해두고 요 주변을 중심으로 식단을 짜는 식. 이거만 해도 진짜 헛돈 안 쓰더라고요. 제철 아니면 맛도 없고 영양가도 떨어지고 가격은 더 비싸요. 비싼 건 둘째 치고 암만 조리해도 덜 달고 밍밍한 애호박 볶음 먹으면 현타 오거든요.
그래서 요즘 제 한 달 식단 플랜은 대충 이 순서로 돌아가요. 필요하신 분들 참고하시길.
-
매월 25일쯤에 다음 달 제철 리스트를 뽑는다. 저는 대충 한 달에 메인 채소 5개, 해산물 2개, 과일 2개 정도로 압축하는 편. 예를 들어 지난 3~4월엔 미나리, 달래, 냉이, 바지락, 딸기, 한치 이렇게 여섯 개를 주력으로 잡았어요.
-
주말 조리 가능 요일을 마킹한다. 저는 영업직이라 주중엔 약속 많을 때 집 밥 거의 포기하고요, 기본 수·목 저녁 집밥 확정, 주말 점심 정도만 조리를 염두에 둬요. 솔직히 주중 네 끼 집밥도 버거운 게 현실. 그럼 한 달에 집밥 대충 12~15끼 정도 나오더라고요.
-
메인 식재료로 조합 짜기. 이게 좀 엑셀 노가다인데 재밌어요. 예를 들어 3월 식재료 미나리랑 바지락을 잡았으면, 가능한 한 주에 한 그릇씩 형태를 바꾸는 식.
- 1주: 미나리 무침 + 바지락 된장찌개
- 2주: 미나리오징어초무침 + 바지락술찜
- 3주: 미나리 달걀말이 + 바지락 파스타(이건 좀 변칙)
- 4주: 미나리 전 + 바지락 미역국 이런 식으로요. 같은 재료라도 요리법 바꾸니까 덜 질리고, 식재료가 안 썩어서 진짜 좋더라고요. 예전에는 냉이 한 봉지 사서 반은 한 번 무치고 반은 냉장고에서 노랗게 만들었는데 요즘은 일요일에 냉이 된장국, 냉이전, 냉이 알리오올리오(이거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이렇게 싹 소비.
- 부족한 영양소는 냉동으로 채운다. 제철이라고 모든 걸 해결할 순 없더라고요. 단백질은 주로 냉동 닭가슴살, 돼지 앞다리살 소분해서 돌려먹고요, 푸른 잎채소는 시금치나 브로콜리처럼 데쳐서 냉동해둔 걸 간간히 써요. 저탄고지 같은 유행 식단 따라가는 건 별로고요, 그냥 영양제 챙겨 먹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오메가3 챙기고 싶으면 등푸른 생선 제철인 7~10월에 고등어 자주 먹는 식.
이 방법의 핵심은 '다 먹을 수 있는 양만 산다'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전 그래서 쿠팡 장보기 할 때 엑셀에 미리 '1주차 필요량' 적어놓고 그대로 검색해서 담아요. 예를 들어 깐바지락은 한 번에 200g이면 2인분 조리 가능하고, 미나리는 한 단이면 전이랑 무침이랑 두 가지 가능. 이걸 일주일로 나누면 장바구니 합계 금액이 보여서 충동구매도 좀 줄어요. 이렇게 안 하면 쿠팡 로켓프레시 또 만 원 채운다고 쓸데없는 음료수 담는 제 모습을 작년에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요.
주말에 이 계획 짜는 데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려요. 자취 5년차인데 식비 이렇게 줄어본 적이 처음이에요. 예전에는 한 달 식비 40 넘길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25~28 사이에서 놀아요. 솔직히 외식비까지 합치면 또 달라지지만 외식은 어차피 영업직은 접대성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고... 이 구조의 진짜 장점은 '오늘 뭐 먹지?' 스트레스가 거의 없어진다는 거. 자취하면서 제일 싫은 게 퇴근길에 마트 들러서 뭐 사야 할지 10분 고민하는 거였거든요.
물론 단점도 있어요. 재료가 너무 한정되니까 가끔 폭발적으로 라면이 땡긴다거나 치킨 시켜먹고 싶을 때 더 강하게 오더라고요 ㅋㅋ 그리고 진짜 제철 초입이나 끝물에는 여전히 비쌀 때가 있어요. 마트 경쟁사 가격 비교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어쨌든 지금은 이 방법으로 세 달 넘게 버티고 있고 자취 생활에 작은 통제력이 생겼다는 느낌. 혹시 식단 계획 고민하시는 분들 있으면 제철 리스트부터 한번 뽑아보시길. 요약 드리자면, 제철 달력이 곧 가성비 레시피 템플릿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