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진짜 큰일이 터지는 것보다 사소한 게 더 오래 가더라고요. 제 경우엔 그게 김치찌개였어요 ㅎㅎ
고등학교 때부터 2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 A가 있어요. 대학도 같이 가고, 결혼식도 서로 사회 봐주고, 애들 돌잔치도 챙겼던 사이였는데. 3년 전에 싸우고 연락이 끊겼어요. 진짜 이유는 별 거 아니에요. 제가 당시에 중2였던 큰애 담임 선생님이랑 면담이 길어져서 약속에 40분 늦었는데, A가 "야, 나도 시간 내서 나온 건데 이게 뭐냐" 이러면서 짜증을 내더라고요.
그날 원래 A가 직장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는 거 저도 알았어요. 근데 저도 면담하면서 우리 애가 학교에서 어떤 상태인지 듣고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그런 와중에 뛰어갔는데 첫마디가 사과도 아니고 짜증이니까 저도 확 돌아버린 거예요. "그렇게 시간이 아까우면 다음부터 보지 말자" 이랬죠. A는 그 말 듣고 그 자리에서 카카오톡 프로필을 바꾸더라고요. 기본 이모지로.
둘 다 연락 안 했어요. 처음 며칠은 '이게 뭐라고' 싶었는데, 한 달 지나니까 이제 연락하기가 더 애매해졌어요. 6개월쯤 됐을 때 A가 먼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서 제가 '고맙다' 짧게 답장했는데, 어색함이 풀리지는 않더라고요. 그렇게 3년이 갔네요.
올해 초에 제가 학교에서 급식 알레르기 사건으로 좀 크게 휘말렸어요. 학부모 항의 전화를 하루에 열 통도 넘게 받고, 일주일 동안 거의 잠을 못 잤네요. 그런데 어느 날 A한테서 문자가 왔어요. "야, 뉴스에 너네 학교 나왔던데 너 괜찮냐"
제가 "어떻게 알았냐" 했더니, 자기도 그 지역 맘카페에서 사진 돌고 있다고. 아직도 제 소식을 알고 있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박혔어요. 그래서 제가 "나 요즘 진짜 힘들다" 이렇게 보냈는데, 답장이 바로 안 왔어요.
다음 날 오후에 집으로 택배가 하나 왔더라고요. 큰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팩 한가득 넣고, 요리 밀키트랑 대용량 반찬 거리들을 잔뜩 보냈더라고요. 특히 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떡갈비랑 순살 닭갈비 밀키트가 제일 위에 있었어요. A가 보낸 거였어요.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고마워서라기보다는, 3년 전에 우리가 싸웠던 게 진짜 얼마나 사소했는지 그때야 실감이 났어요. 40분 늦은 것, 그날 서로 기분 나빴던 것. 그거 하나로 이렇게 오래 연락을 안 했구나 싶어서.
A한테 전화했더니 받자마자 "아 씨, 너 울었냐? 목소리 왜 그래" 이럽니다 ㅋㅋ 그리고 하는 말이 "솔직히 우리 왜 싸운 건지 나도 가물가물해. 네가 늦었던 거 같은데" — 자기도 이유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3년 전에 그렇게 속상해하고 서운해했으면서도, 정작 이유는 그렇게 휘발되고 감정만 남았던 거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김치찌개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내가 늦었잖아" 이랬더니 "어 맞아! 그 집 그때 망했어! 네가 늦어서 망한 건 아니고 그냥 장사가 안 됐대" 이럽니다 ㅎㅎㅎ 결국 둘 다 웃으면서 끝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화해한 과정이 참 허무해요. 누군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잘못을 정리하고 이런 게 아니었어요. 시간이 쌓이니까 싸움의 이유가 너무 작아져서 없어져버렸고, 상대가 힘들다는 소식에 아무 생각 없이 뭔가 보내고 싶어지는 그 마음 하나로 풀렸네요.
물론 이게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어떤 친구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평생 못 볼 사이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제 경우엔 이 친구랑은 진짜로 끊을 생각이 없었나 봐요. 아니었으면 택배 받고 바로 전화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요즘은 거의 매주 톡하고, 밀키트도 서로 공구하고 나누고 그래요. A가 보내준 그 떡갈비 밀키트는 솔직히 좀 달아서 둘째가 별로라고 했지만, 그래도 A 앞에서는 맛있다고 했습니다 ㅋㅋ 이런 게 친구 아니겠어요.
혹시 마실 분들 중에 이렇게 오래 끊겼다가 다시 연락한 썰 있으신가요? 전 진짜 3년 만에 보니까 머리 숱만 빠졌더라고요. 서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