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전, 비도 오고 해서 집에만 있으려니 아내가 슬슬 눈치를 주더군요. "여보, 그 안방 옆 수납장 서랍 언제 정리할 거예요?" 평소에는 못 들은 척 넘어가는데, 어제는 괜히 걸려들었습니다. 공구함 정리한다고 꺼내둔 육각렌치 세트가 거실 한가운데 있었거든요. 반박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수납장에는 7년 전 입사할 때 받은 명함집, 군대에서 쓰던 철제 손톱깎이, 언제 샀는지 모를 AA건전지 한 통까지 별별 게 다 나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손이 오래 머문 건 낡은 지퍼백에 든 플라스틱 부품 하나였습니다. 2017년형 싼타페(DM) 리어 와이퍼 암 캡이었어요.
정확히 기억납니다. 장마철에 와이퍼가 유난히 떨리길래 모터인 줄 알고 서비스센터 갔더니, 젊은 기사분이 "캡 균열 때문에 빗물 들어간 거예요. 교체하면 3만 5천 원입니다" 하더군요. 부품값 3,500원, 공임이 3만 원이라는 얘기에 그 자리에서 "제가 할게요" 하고 나왔습니다. 철물점 가서 캡 하나 4,000원 주고 사서, 유튜브 정비 영상 다섯 번 돌려보고 작업했어요. 10분도 안 걸리더군요. 헤라로 살짝 떼고 새 부품 끼우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그날 이후로 저는 작은 부품 하나도 함부로 안 버리게 됐습니다. 차에서 탈거한 볼트나 클립도 규격 적어서 유리병에 보관하는 버릇이 생겼죠. 이 와이퍼 캡은 왜 따로 챙겨뒀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교체한 거니까 쓸모없는 고장품일 텐데, 뭔가 아까워서 서랍 한구석에 넣어둔 모양입니다.
아내는 그거 보고 "또 이상한 부품 모으기 시작했네" 하더군요. 제가 뭐라고 답했냐면, "이 캡 하나 덕분에 내가 차 정비를 시작한 거나 다름없어" 하고 둘러댔습니다. 실제로 그때 서비스센터 견적 듣고 '내 손으로 고쳐보자' 결심한 게, 지금 와서는 미션 오일 교체나 흡기 청소 같은 큰 작업까지 손대게 된 계기였으니까요.
어쨌든 정리는 했습니다. 손톱깎이는 녹 슬어서 폐기, 명함집은 추억 보관함으로 이동, 건전지는 테스터기 찍어보니 전압 1.2V 이하라 수거함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와이퍼 캡은 또다시 새 지퍼백에 넣어서, 이번엔 공구함 서랍으로 옮겼습니다. 아내가 보면 또 한소리 하겠지만, 이쯤 되면 미니멀보다 기억이 우선인 물건도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다 싶습니다.
정리하다 보면 시간 참 빨리 갑니다. 하나하나 추억이 붙어 있는 물건들 치우는 게 생각보다 에너지가 드는 일이예요.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강제로라도 서랍을 열어보는 게 나쁘지 않더군요. 안 그랬으면 이 부품을 다시 들여다볼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여러분도 혹시 오래된 서랍 정리하실 일 있으면, 정비 지침서나 사용설명서 같은 건 따로 분류해두시기 바랍니다. 부품만 덜렁 보관하면 세월 지나서 용도 까먹는 경우가 많아요. 전 이 캡도 부품번호를 따로 적어둘 걸 후회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