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전, 집 안 대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평소에는 손이 잘 안 가던 책장 밑 서랍을 정리하다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사진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표지는 이미 오래전에 색이 바랬고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치울 생각이었습니다. 어차피 오래된 물건이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아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첫 페이지에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가족과 함께 갔던 설악산 여행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인데, 지금 보니 초점도 약간 나갔고 노출도 제대로 안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흐릿한 사진 속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김밥을 들고 찍은 제 표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 세상 걱정 없이 밝게 웃고 있더군요. 내용물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김밥이 참 맛있었다는 생각만 납니다.
뒤쪽으로 넘기니 대학교 1학년 MT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습니다. 당시 동기들과 텐트를 치고 밤새 이야기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때 쓰던 텐트는 요즘 브랜드 제품처럼 가볍거나 기능적이지 않았습니다. 무겁고 폴대도 묵직한 구식이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무겁고 불편하던 장비가 지금은 참 견고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그 텐트는 10년 넘게 썼고, 한 번도 찢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지금 제가 캠핑 장비를 고를 때 내구성을 우선시하는 기준이 여기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진을 계속 넘기다 보니, 입사 첫해 품질관리팀 신입 시절 사진도 나왔습니다. 당시 현장 실습 중이었는데, 작업복을 입고 마이크로미터를 들고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선배님이 "측정은 정비 지침서 봐가면서 해도 실수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위로해주시던 게 기억납니다. 그 시절 이후로 저는 어떤 장비를 다루든, 반드시 매뉴얼을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사진 속 제 얼굴은 긴장 반, 호기심 반으로 아주 진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기려는데, 사진첩 뒷표지 안쪽에 작은 종이가 말려 들어가 있었습니다. 펴보니 아버지가 손수 쓰신 메모였습니다. "1998년 8월, 아들이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처음 필름을 통째로 찍었다. 초점 나간 사진이 대부분이지만 표정은 참 좋다." 이걸 읽는 순간, 그냥 앉아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메모를 언제, 왜 여기 끼워두셨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청소를 시작한 지 3시간이 지나도록, 저는 먼지 쌓인 서랍 앞에 그대로 앉아 사진첩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날 청소는 제대로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계획된 정리가 아니라, 이런 우연한 발견이 더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집 안 구석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하시면, 시간이 꽤 지나도 너무 자책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 시간은 분명히 가치가 있었을 테니까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