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장마가 시작되면 저는 제일 먼저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거든요. 어제 저녁부터 빗줄기가 심상치 않더니,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밖이 완전히 물벼락이었어요. 마침 라디오에서는 내일부터 중부랑 호남 쪽에 시간당 50mm짜리 장대비가 쏟아질 거라고 하고, 이번 주말에는 비가 그치자마자 낮 기온이 33도까지 올라서 첫 열대야주의보가 내려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이런 소식 들으면 주부 입장에서는 장 보는 패턴부터 바꿔야 하거든요.
원래 오늘 대형마트 가서 일주일 치 장을 볼 계획이었는데, 당장 포기했습니다. 시간당 50mm면 우산 써도 소용없는 수준이라는 건 작년에 제가 두 번이나 당해봐서 잘 알거든요. 작년 7월에도 비슷한 예보에 그냥 나갔다가, 마트 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리는 10초 만에 신발이 물에 둥둥 떠다니는 줄 알았어요. 그날 산 양상추가 물을 너무 많이 머금어서 이틀 만에 끝물처럼 흐물흐물해져 버렸던 기억이 나요. 그러니까 이런 날은 집에 있는 재료로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본격적으로 냉장고 파먹기 모드로 들어갔어요. 냉동실 구석에서 2주 전에 사둔 돼지 앞다리살 덩어리 꺼내서 해동 걸었고, 냉장고 야채 칸에는 애호박 하나, 감자 네 개, 당근 반 토막이 있네요. 아시다시피 장마철에는 채소가 금방 시들거나 물러서 아깝거든요. 그래서 오늘 점심은 이걸로 전부 때려 넣은 카레를 큰 솥에 한가득 해놨어요. 애들이 장마 기간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을 양이에요. 저희 집 큰애는 장마만 되면 습해서 입맛 없다고 찌개만 찾는데, 이런 날 카레 같은 건 진짜 보약이에요. 양파 충분히 볶아서 단맛 내고, 감자는 조금 크게 썰어야 퍼지지 않고 나중에 전자레인지 데워도 식감이 살아있거든요.
근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이번 주말 폭염이에요. 비가 그친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 그 습기 머금은 공기가 그대로 찜통으로 변하는 거라 진짜 짜증 나요. 예보에서 낮 최고 33도에 첫 열대야주의보 가능성 있다는 얘기 듣자마자, 저는 오늘 아침에 압력밥솥으로 밥 세 번 연속 해서 식힌 다음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었어요. 아시다시피 폭염에 가스레인지 켜고 밥 하는 것만큼 집 안 온도 올리는 주범이 없거든요. 압력밥솥은 확실히 취사 시간이 짧아서 여름에 진짜 유용해요. 밥솥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게 이런 때 쓰는 말이에요. 김이 덜 올라오니까 주방이 덜 후끈해지고, 냉동 밥은 전자레인지 돌리면 갓 지은 것보다 찰기는 덜해도 여름철 입맛에는 오히려 낫거든요.
열대야 대비도 좀 해놨어요. 거실에 써큘레이터 위치를 아예 창문 쪽으로 돌려놨어요. 아시다시피 열대야엔 선풍기 바람이 직접 몸에 닿는 것보다 집 안 공기를 빼주는 게 훨씬 효과가 좋거든요. 저녁 8시 넘어서 바깥 공기가 실내보다 살짝만 선선해져도, 창문 반대편에 써큘레이터 틀어서 바깥으로 내보내면 체감 온도가 진짜 달라져요. 이건 작년에 남편이 인터넷에서 본 거 따라 해봤다가 저랑 싸우면서 검증한 방법이에요. 처음에는 그냥 선풍기 틀어놓는 게 낫지 않냐고 서로 고집 부렸는데, 막상 해보니까 습도가 낮아져서 땀이 덜 나더라고요. 올해도 이 방법 쓸 거예요.
장마에 폭염에 열대야까지 한꺼번에 몰아친다는 예보 보니까, 진짜 우리나라 여름은 미련 없이 퍼붓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이제는 계절이 그냥 극단으로 가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고요. 이런 날씨에는 운전하시는 분들도, 혹시 시간당 50mm 올 때는 와이퍼 최고 속도로 해도 앞이 안 보일 수 있으니까 가로등 켜진 곳에서는 무조건 감속하셔야 해요. 저도 2년 전에 애 태권도 학원 픽업 갔다가 갑자기 퍼붓는 비에 도로가 하얗게 변해서, 정말 앞 차 뒷모습도 안 보여서 식은땀났거든요. 그냥 갓길에 잠깐 정차하고 비가 좀 잦아들길 기다렸어요. 그게 답이에요. 목숨보다 급한 약속은 없어요, 진짜.
어쨌든 오늘 저녁은 카레로 간단하게 때우고, 내일 아침에는 빗소리 들으면서 냉동 만두랑 떡국떡 찾아서 장마철 해장국 끓여볼까 해요. 이런 날은 뜨겁고 국물 있는 게 오히려 속이 진정되거든요. 다들 냉장고에 있는 것 이것저것 꺼내서 버티고, 주말 폭염 대비해서 지금부터라도 땀 뻘뻘 나는 요리는 피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저도 사실 오늘 카레 만들 때 후드 최고로 틀고, 앞치마 대신 젖은 수건 목에 걸고 했어요. 그렇게라도 안 하면 진짜 불 앞에 서 있기 싫어지는 게 여름 주방이에요.
그나저나 혹시 다른 분들은 장마철에 어떤 메뉴로 버티세요? 저는 카레랑 볶음밥 위주인데, 뭔가 좀 질려서요. 장마 끝나면 바로 폭염이라 입맛 살릴 만한 다른 아이디어 있으면 마실 분들도 좀 알려주세요. 저는 당분간 창밖 빗줄기 보면서 냉장고 파먹기에 집중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