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비가 오락가락하니 집에만 있자니 몸이 찌뿌둥하고, 그렇다고 멀리 나가긴 귀찮고 해서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돌고 있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이런 날은 버스 정류장 앞 편의점도 좋지만, 저는 으레 좁은 골목 안쪽으로 발이 향하는 편이에요. 큰길보다 바람이 덜하고, 가게 앞 처마 밑으로 비 피하기도 수월하거든요. 그렇게 걷다가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작은 서점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걸 봤어요. 서점이라고 하기도 뭣한 게, 원래는 그 자리가 오래된 문방구였거든요. 언제 책방으로 바뀌었나 싶어 가까이 가 봤더니, 유리문에 '오늘 저녁 7시, 조용한 낭독회' 라고 떡메모지에 손글씨로 붙어 있더라고요.
손님이 몰리는 것도 아니고, 다들 우산 접으면서 수런수런 들어가는 분위기라 저도 모르게 구경할 겸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시다시피 제 나이쯤 되면 뭔가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이건 그냥 내 집 마당 들어가듯 자연스러웠거든요. 안에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들이 대여섯 명 정도, 서가 사이에 놓인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고, 젊은 여성 두 분이 돌아가며 책을 읽고 있었어요. 한 분은 릴케의 시집을, 다른 한 분은 제목을 정확히 기억 못 하는데 자기 에세이를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읽더라고요. 조명도 형광등이 아니라 바닥에 작은 스탠드 몇 개 켜 놓은 게 전부라, 책장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졌고, 창밖 빗소리와 뒤섞이니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리는 느낌이었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낭독회' 하면 왠지 문학 소녀 같고 그런 분위기라 나랑은 안 맞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앉아서 듣다 보니, 책 읽어주는 분들의 음성 톤이나 숨 쉬는 간격, 종이 넘기는 소리 하나하나가 그냥 일상 그 자체더라고요. 완벽하게 읽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가끔 더듬거나 먼지 쌓인 책 냄새에 재채기하는 모습도 그냥 다 괜찮았어요. 한 구절을 읽고 잠시 쉴 때면,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는 게 느껴져서 좋았거든요. 중간에 주인장 같아 보이는 분이 유리 주전자에 보리차를 내려서 조용히 따라 주셨는데, 그 보리차의 구수한 냄새까지도 그 공간의 일부처럼 스며들더라고요.
한 40분쯤 지났나, 마지막 순서로 들려준 짧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빨래 널린 옥상에서 이웃과 나눈 대화를 담은 수필이었는데, 거기 '햇볕 잘 드는 줄은 나만 아는 게 아니었지' 하는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거든요. 아시다시피 저도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 널 타이밍 잡느라, 앞집에서 먼저 털면 괜히 졌다 싶은 그 기분 알거든요. 그런 소소한 생활의 순간들을 누군가가 글로 옮기고, 또 그걸 소리 내어 듣는다는 게 참 괜찮은 시간이었어요. 딱 거창한 감동은 아니었어요. 그냥, 오랜만에 내 마음에 작은 빗물이 스며들어 촉촉해지는 느낌이었달까요.
끝나고 나오는데 서점 주인장이 작은 쿠키를 한 조각씩 나눠주더라고요. 값은 받지 않고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마디만 하면서요. 돌아오는 길에 그 쿠키를 비 맞지 않게 호주머니에 잘 넣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네 책방이라는 게 결국 사람 냄새로 버티는 거구나. 저 문구점이 문 닫고 뭐가 들어설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조용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네요. 집에 와서 남편한테 얘기했더니만 '요즘 시대에 낭독회를 어디서 하냐'고 코웃음 치던데,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스마트폰 스피커로 백 번 듣는 것보다, 작은 방 안에서 같이 숨 쉬는 다섯 사람의 기척이 더 크게 들릴 때가 있다고요. 진심으로 그랬거든요.
오늘은 정말 별 기대 없이 나갔다가 작은 선물 받은 기분이에요. 다음번에 또 이런 게 있으면 빗소리 핑계 대지 말고 일부러라도 가 볼까 해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슬슬 그 문방구 시절부터 그 자리를 지켜본 동네 사람으로서, 가끔은 책 한 권 사 줘야겠다는 의무감도 조금은 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