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진짜 오랜만에 날 잡고 안방 서랍장 정리했어요. 미니멀 라이프고 뭐고, 디자인 일 하면서 깔끔한 데스크 세팅은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으면서 정작 내 방 서랍은 몇 년째 블랙홀이었네요 ㅎㅎ
맨 위 칸 열자마자 나온 건 작년 여름 산 휴대용 선풍기. 목에 걸고 다녔던 그건데 이걸 왜 여기다 넣었지 싶더라고요. 그 아래서는 어디서 받은 건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부동산 회사 볼펜 7자루. 글씨도 안 써지는 걸 왜 버리지 않았나 몰라요.
그러다 손이 멈춘 순간. 낡은 코닥 필름 통이 나왔어요. 대학 졸업반 때 첫 필름 카메라 샀을 거예요, 아마. 뚜껑 열어보니까 진짜 필름 한 롤이 그대로 들어있는 거 있죠. 현상도 안 하고… 이게 무슨 사진인지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어쩐지 버리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인화가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현상해도 흐릿한 빛 덩어리만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기분.
그리고 그 옆엔 작은 지갑. 군대 갔던 남동생이 휴가 나와서 사줬던 거예요. 가죽 다 벗겨지고 지퍼도 반쯤 맛이 갔는데 거기엔 500원짜리 동전 두 개랑 옛날 영화관 포인트 카드가 들어 있더라고요. 그 카드 보니까 문득 군대 간 동생 기다리면서 혼자 밤 늦게 영화 보러 다녔을 때 그 외로움 같은 게 생각나서 좀 슬펐어요.
가장 밑바닥엔 교통카드가 붙어 있었어요. 아직 잔액이 3000원쯤 남아 있는 걸 확인했는데, 이 카드 못 쓴 지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네요. 그때는 버스 타고 출근했었는데 지금은 전철로 바뀌었고, 그 사이에 많은 게 변했구나 싶더라고요.
이런 걸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미니멀한 삶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진짜 버리지 못하는 건 물건이 아니라 그 순간들을 본 기억이 아닐까 싶어요. 필름 통이고, 지갑이고, 교통카드고 사실 다 지금 생활엔 필요 없는 건데 꺼내서 한참 들여다보는 제가 좀 우습기도 하고.
그래도 결국 절반은 버렸어요. 필름이랑 동생 지갑 딱 두 개만 남기고요. 볼펜 7자루랑 선풍기는 깔끔하게 작별 인사. 이게 저한테 가능한 최선의 미니멀인 것 같아요. 완전히 빈 서랍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건 왜 남겼는지 기억할 수 있는 정도.
모처럼 서랍 하나 정리했는데, 마음도 같이 정리한 느낌이에요. 다들 집에 이런 타임캡슐 같은 서랍 하나쯤 있지 않나요? 여러분은 뭐 나왔어요? ㅎㅎ